나, 종이, 붓 내 화실에는 고요함으로 가득 차 있다 시간이 흐르고 세상은 내 앞에 서 있다 모든 것이 잡힐 듯이 가까이 느끼지만 아주 멀다 화실에 들어올 때마다 사람들이 살다 버리고 떠난 섬에 온 것처럼 모든 것이 텅 비어 외롭다 내가 그림을 그리려 할 때마다 빈 종이가 나를 두렵게 한다 떠오름이 없어 벌받는 사람처럼 고생한다 나 또한 찾을 것이 없다 얼마 후 이런 고생 끝에 내 속에 있는 장난기가 슬슬 풀어져나온다 이럴 때면 나는 밀림 속 타잔처럼 느끼며 투우 싸움장에 있는 것 같고, 가끔은 상처받은 부상병처럼 느낀다 때론 긴 악몽에서 헤매는 것 같다 가을 들판을 파헤치며 사는 두더지 같고 신들려 춤추는 무당처럼 느끼며 뭔가에 잔뜩 붙잡혀 있다 나는 어느새 정신없이 어떤 사랑에 푹 빠져 있고 구름처럼 외로이 떠돈다 때로는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처럼 때로는 계속 임신한 여자처럼 느끼며 때로는 배가 고파 먹이를 찾아 헤매는 날짐승처럼 느낀다 나, 종이, 붓 우리 모두가 지쳐 있다 내가 어디서 무슨 짓을 했는지 나도 모른다 - 노은님,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