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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한향

신라한향

2025. 10. 22.(수) ~ 2026. 04. 26(일)

박대성 1관~5관


※《신라한향》 전시에서 관람하실 수 있는 박대성 작가의 작품은 총 6점입니다. <반가사유상>, <코리아 판타지>, <무제>(난 시리즈) 4점이며, 그 외에 아카이브실에서 <나리> 1점, 아틀리에(불편당) <고미> 3점을 관람하실 수 있습니다.


목차
  • [연기]
    [함축] 일월과 연화, 그리고 염원
    =김민, [적연명] [석가여래 상주 설법탑] [다보여래 상주 증명탑] [관음염화]
    [충담] 투명과 탑파, 그리고 응시
    =박선민, [시간의 연결성: 유리서]
    [전아] 통격과 화해, 그리고 회통
    -송천, [만파식적] [바이올린] [생사] [관세음보살] [성모마리아] [수월관음도]
    [웅혼] 미소와 문향, 그리고 웅혼
    -박대성, [코리아 판타지] [반가사유상] [난]
    [여적] 다시_사람됨을 찾아서
  • [연기緣起]
    [신라한향]은 모두 네 분의 작품을 세상에 내놓고 있습니다. 박대성, 송천, 김민, 박선민이 그 주역들입니다. 박대성은 수묵화(水墨畵), 송천은 불화(佛畵), 김민은 한지회화(韓紙繪畵), 박선민은 유리공예(琉璃工藝)입니다. 연배도 다르고 사는 곳도 다르며 전문 분야도 다른 분들이 ‘신라’가 주는 심미적 자극에 착안하여 같은 공간에 자리하였습니다. 이분들은 이 기획을 위해 새로 작품을 창작하는 노고를 마다하지 않았고, 작품의 완성도를 위해서 전시가 시작되는 전까지도 작품을 손보고 메시지를 정리하였습니다. 그들은 한순간도 긴장을 늦추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분들의 진지한 작업 태도와 성실함에 찬사를 보냅니다.

    이들은 수묵으로 불상의 미소를 그리면서 향기까지 전하려고 했고, 푸르다 못해 투명한 유리병에 비치는 나를 응시하도록 은경(銀鏡)까지 세심하게 마련하였으며, 금빛이나 은빛으로 붓질하였으나 겉 빛에 흔들리지 않는 내면을 보여주려고 했고, 관세음보살과 성모마리아를 맞세우면서 소리까지 보여주려고 했습니다. 이제 그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먼저 작품을 읽으면서 찾아낸 풍격을 말씀드리되 사람됨의 인격적 성숙 과정을 기준 삼아 작가와 작품을 안배하여 논의하였습니다. 물론 이는 그저 평범한 사람이 읽어낸 서사일 뿐입니다.
  • [함축含蓄], 일월과 연화, 그리고 염원
    =김민, [적연명寂然明] [석가여래 상주 설법탑] [다보여래 상주 증명탑] [관음염화]

    여기에 참주인이 있나니(是有眞帝)
    그와 함께 가라앉았다가 떠오르노라(與之沈浮)
    본제 1관으로 들어가 봅니다. 전면에 석굴암의 본존불이 앉아 있고 그 옆으로 불국사의 석가탑과 다보탑이 세워져 있습니다. 이들 앞에는 연지(蓮池)가 놓여있습니다. 사찰의 대웅전을 눈앞에 둔 듯합니다. 언젠가 다보탑과 석가탑의 규모에 놀란 적이 있습니다. 그저 예쁘게 앉아 있다고만 생각했었는데 그들의 키는 어른 몇을 훌쩍 뛰어넘었습니다. 지금 내 눈앞에 서 있는 탑파들도 무려 5미터가 넘습니다. 오히려 그들 사이에 내걸린 본존불의 모습이 작게 느껴집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작가는 원근을 이용하여 나와 거리가 가까운 탑, 그리고 그 안쪽에 고즈넉이 앉아 있는 부처를 그린 것이었습니다. 평면의 동일한 화면에 그림 세 점을 배치하여 깊이감을 주었던 것이지요. 깊이를 더하니 부처로 향하는 나의 마음도 집중되고 있습니다.

    본존불과 탑파가 그려진 검은 바탕이 시선을 끕니다. 검은빛의 안료는 빛을 받을 때마다 반사되면서 그 공간을 신비로운 우주로 변화시키고 있어요. 원래 검은빛은 종교적 심성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사실 검다고 했지만 이른바 ‘흑색(黑色)’은 아니지요. 칠흑 같은 어두운 빛깔이 아니라 현색(玄色)에 가까운데, 붉은빛, 푸른빛이 감도는 검은빛은 심연과도 같은 무저(無底)의 느낌을 더하면서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습니다. 그 안에 거대한 다보탑과 석가탑이 안치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각각 하나씩 천체의 빛을 받아 빛나고 있습니다. 다보탑의 왼편에는 은빛 달이 배경으로 그려있고, 석가탑의 오른편 위쪽에 금빛 해가 빛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금빛과 은빛은 탑파에 부딪히면서 파쇄(破碎)되고 있습니다. 파쇄된 빛이 다시 튀어 오르며 살아있어요. 되살아나는 빛! 저는 이 빛살을 넋 놓고 바라봅니다. 다보탑에 내려지는 은빛은 차분하게 가라앉으며 은은히 빛을 뿌리고, 석가탑에 뿌려지는 금빛은 탑신을 더욱 환하게 만들어 줍니다. 그런데 작가가 노렸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빛과 관련될 터일 듯한데, 잠시 생각하느라 작품 앞에서 문득 시간을 보냅니다.

    그러다 고개를 숙이니, 순간 연지(蓮池)가 눈에 들어옵니다. 특별한 문양이나 장식도 없이 물이 담겨 있습니다. 고요한 수면, 흐름의 흔적조차 없는 물, 그런데 그 안에서 빛이 납니다. 빛의 아우라 속에서 무언가 형체가 어렴풋하게 드러납니다. 바로 본존불과 두 탑이었습니다. 정면에 놓인 부처와 탑에 정신이 팔려있던 저는 이 안에 또 하나의 부처가 있음을 그제야 알았습니다. 그런데 뭔가 연지에 보이는 부처와 탑은 또렷하지 않습니다. 당연하지요. 실상과 허상의 차이가 그러한 것입니다. 물론 그림 속의 부처와 탑도 실상은 아니지요. 그림 속의 허상이 다시 연지 속의 허상으로 출현하니, 도대체 어느 것이 실상이고 허상일까요? 어쩌면 실상과 허상의 경계를 흩으며 그 차이를 없애려는 것은 아닐까요? 경계가 허물어진 그사이에 한 송이 연꽃을 들고 있는 관세음보살이 은은한 미소를 띠며 서 있습니다. 작가가 연지 속의 허영(虛影) 속에서 연꽃을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란 듯합니다. 세심한 배려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세상의 떠다니는 흙먼지들이 갖가지로 떠돌고 만 갈래로 갈라지더라도 하나의 이치로 모이고, 수많은 그림자 속에 흔들리는 형상들도 하나인 부처로 귀일(歸一)한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 이것이 작가의 안배일 듯합니다. 저는 이곳에서 ‘함축(含蓄)’을 읽습니다. 함(含)은 머금는다는 뜻이고, 축(蓄)은 쌓는다는 말입니다. 허(虛)를 머금어 실(實)을 쌓는다는 뜻이에요. 굳이 글자 하나 더하지 않아도 만상(萬象)을 담아낼 수 있음을 표현한 풍격입니다.

    그런데 제가 놓친 게 하나 있습니다. 바로 본존불의 모습이에요. 석가탑과 다보탑의 사이에서 본존불은 조용하면서도 묵직한 모습으로 놓여있습니다. 본존불은 검은 공간에 돌 빛 그대로 그려져 있으며 외부의 빛을 받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그로부터 빛을 느끼는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일까요? 한번 생각해 봅니다. 석가탑과 다보탑은 외부의 빛을 받아 광채를 뿌리거나 반사하는 것이라면, 본존불은 그 자체가 함광(涵光)한 존재로서 현현하지 않은 염원까지 포용하고 있습니다. 이 점은 중요합니다. 빛은 사실 부처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마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누구에게도 외면받는 불상을 두고, 우리는 부처님이라고 부르지 않아요. 그저 구리로 만든 건조물일 뿐이지요. 불상이 빛나는 것은 바로 그를 앞에 두고 진심으로 무언가 염원하는 사람이 있을 때입니다. 그런 점에서 작가의 “신라인의 믿음과 서원을 담고 싶었다“는 말은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빛은 염원이지요. 그런 염원을 담은 본존불은 빛을 머금고 무젖어있기에 굳이 은빛의 달도 금빛의 해도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 [충담沖澹]_투명과 탑파, 그리고 응시
    =박선민, [시간의 연결성: 유리서琉璃書]
    소박하게 거처하며 침묵하니(素處以黙)

    오묘한 천기가 더욱 미묘하여라(妙機其微)
    제2관으로 발길을 옮깁니다. 어스름한 방 안에서 빛이 쏟아집니다. 다소 어두운 방으로 들어서자, 그 한가운데 푸른 빛이 감도는 하얀 오층탑이 서 있습니다. 자세히 보니 탑의 층마다 유리병(琉璃甁)들이 놓여있습니다. 탑의 축으로부터 쏟아지는 빛이 병을 통해 푸르게 투사되며 신비로운 느낌을 줍니다. 연한 푸른빛이 감도는 병도 있고, 하늘빛을 닮은 병도 있으며, 초봄 버들 빛을 담은 병도 있고, 그보다 더 연둣빛이 강한 병도 있습니다. 이제야 푸른빛으로 물들어 가는 하얀 병도 있습니다. 주둥이가 긴 병도 있고, 술잔을 닮은 병도 있으며 넓적하게 입을 벌린 병도 있습니다. 다양한 모양의 유리병들은 저마다의 높이를 가진 채, 각자의 빛으로 빛나고 있습니다. 흡사 우리네의 인간사와도 닮았습니다.

    우리는 언젠가 삶을 떠나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죽은 자들이 찾아가는 세상은 어떠한 곳일까요? 종교적 신념을 지닌 분들은 그곳이 빛으로 둘러싸여 있다고들 말합니다. 생명의 소멸과 빛의 소등을 견주는 문학적 수사(修辭)를 볼 때면, 사람들은 생명과 빛을 하나로 이해하고 있는 듯합니다. 빛은 세상을 밝히지요. 낮의 태양이든, 밤의 달이든 모두 빛으로 세상을 밝힙니다. 그러나 빛이 미약하거나 잠시 꺼져 있을 때도 생명은 살아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거나 짙은 어둠 속 차가운 공간에서도 우리가 느끼지 못하는 생명의 맥박은 뛰고 있습니다. 느낄 수 없는 생명의 존재를 상상할 수 있다면 빛과 생명을 그대로 일치시켜 이해하는 것은 단순 논리에 빠질 우려가 있어요. 그래서 빛은 어둠 속에서 더 환하게 존재의 생명을 밝혀주고 있는 듯합니다. 눈앞의 오층 유리 탑도 언제나처럼 맥박을 뛰고 있는 생명을 빛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지요.

    작가는 빛에 시간을 같이 연결합니다. 그래서 “유리공예는 빛과 시간, 그리고 물성을 동시에 담아낼 수 있는 매체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즉 작가는 단순한 재현을 넘어 시간 잇기를 원합니다. 유리라는 사물이 아주 오래전부터 있었던 것임에 착안한 것이지요. 오래된 사물이 지금-이곳에서 빛을 피워내고 있음을 이야기하려 합니다. 작가에게 유리병은 하나의 책[書]이었습니다. ‘유리(琉璃)’가 종교적으로 청정과 극락을 상징하고, 불과 모래가 만나 빚어낸 물질이며, 종교적 상징이나 사회적 권위의 용도로 쓰였음을 상기하면서, 자신의 유리병도 그런 역사[시간]를 담아내기를 원합니다. 병(甁)을 서(書)로 전변시키는 상상력이 놀랍습니다. 그런데 궁금해집니다. 탑은 왜 오층일까요? 또한 층마다 다른 서사가 있는 것일까요? 유리병 하나에 이야기 하나만 담길까요? 그리고 왜 유리병일까요? 마지막은 상상할 수 있을 듯합니다. 병은 이야기를 ‘담아내어 보존할 수 있는’ 기능이 있습니다. 매끈한 병의 몸체는 사람이 손에 쥘 수 있는 아름다운 비율이기도 하지요. 그런 점에서 유리를 인간과 접속하는 마음이 병의 형상으로 이어진 것은 아닐지 생각해 봅니다. 그 밖의 질문은 보는 이들의 몫이겠지요.

    그런데, 여기까지 읽고 끝나면 좀 허전합니다. 유리병이 놓인 탑이 서사의 주인이라면, 박물관의 박제품들과 무슨 차이가 있을까요? 문득 눈을 들어 사방을 바라보니, 건너편 벽에 은경(銀鏡)이 하나 있습니다. 그 은경 속에 내가 서 있습니다. 유리병의 투명한 빛을 받은 나[我]의 모습이 은경에서 빛나고 있습니다. 이제야 유리병이 나와 하나로 이어집니다. 나는 응시(凝視)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오층탑이 뿜어내는 푸른빛에 시선을 빼앗겼는데, 차츰 그 빛에 비치고 있는 나를 보게 됩니다. ‘응시’는 나의 시선이 하나로 모이는 것이지요. 흩어지는 빛을 은경은 하나로 모아서 그 안의 나를 지켜보도록 합니다. 마치 자화상과 같습니다. 내가 나를 보고 있습니다. 그 순간, 나는 슬퍼집니다. 내가 살아온 이야기가 그 안에 들어있기 때문이지요. 힘겹게 서 있는 내가 안쓰럽기도 합니다. 가까이 다가가 손을 잡아보려 합니다. 내 손과 은경 속의 또 다른 나의 손이 만납니다. 그 주위로 푸른빛이 아름답게 퍼져갑니다.

    투명하게 쌓아 올려진 탑파(塔婆)에 내가 담깁니다. 투명은 곧 간투(看透), 즉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입니다. 원래 탑파는 삶을 마감한 승려의 사리를 두는 곳입니다. 하나의 무덤이지요. 그 무덤이 다시 삶을 시작하는 기회를 줍니다. 응시를 통해 생명을 찾은 나는 이제 새로운 시간 이야기를 시작하게 됩니다. 작가가 우리를 위해 조용히 안배해 둔 은경은 소박하지만, 삶과 죽음을 넘나들면서 우리를 다시 새로운 삶으로 이끄는 천기(天機)가 됩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담박하고 깨끗한 나를 들여다보는 미적 경계인 ‘충담(沖澹)’을 경험하게 되지요.
  • [전아典雅], 통격과 화해, 그리고 회통
    -송천, [만파식적] [바이올린] [생사] [관세음보살] [성모마리아] [수월관음도]
    꽃잎 떨어지며 말도 없으니(花落無言)

    사람 담박하기가 국화꽃 같네(人澹如菊)
    제4관으로 들어서자마자 강렬한 대조가 눈에 들어옵니다. 스테인리스 만파식적, 느티나무 바이올린, 붉은빛과 푸른빛이 견줘지는 삶과 죽음, 그리고 모성적 이미지를 공유하는 관세음보살과 성모마리아 등이 그러합니다. 대조는 전달하려는 메시지를 분명하게 각인시키려 할 때 자주 쓰는 수사입니다. 색이든 재료이든 도상(圖像)이든 대조의 방식은 다양합니다. 이는 대비되는 항(項) 사이에 화해할 수 없는 갈등과 격절이 있음을 드러낼 때 사용하거나 아니면 그런 가시적 경계의 넘기를 상상하도록 자극하려고 사용합니다. 더러는 이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도록 요구하기도 하고, 혹은 제3의 선택이 있음을 암시하기도 합니다. 문득 저의 고민은 깊어집니다. 도대체 작가는 조각과 추상화와 성화(聖畵), 그리고 불화를 안배하면서 무엇을 말하고자 한 것일까?

    저는 이것을 통격(通隔)으로 이해했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격절(隔絶)을 겪습니다. 공간적으로 시간적이고 사회적으로 격절의 유형은 다양합니다. 본원적으로 주어진 격절을 극복하기는 쉽지 않지요. [만파식적]을 보면서 느닷없는 파격에 놀랐습니다. [삼국유사]의 서사를 익히 알고 있는 우리로서는 쇠의 질감을 가진 젓대(笛)를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바이올린]도 마찬가지입니다. 작가는 두 악기를 통해 동양과 서양의 소리 사이의 격절을 소통시킵니다. 그런데 이 격절은 거기에 그치지 않아요. 소리는 귀로 듣습니다. 그러나 이곳의 소리는 듣지 않고 눈으로 봅니다. 만파식적과 바이올린은 소리를 눈으로 보여줍니다. 바이올린은 음표처럼 휘어져 있고, 만파식적은 유선형 철판으로 소리를 흘러내립니다. 눈과 소리 사이의 격절도 해소한 것이지요.

    악기 소리에 심취해 있다가 ‘나를 쳐다보는 눈들’을 바라봅니다. 붉은빛과 푸른빛의 색감 대조 속에서 흔들리는 눈들이 저를 보고 있었어요. 추측하건대 하나는 음이고 하나는 양인데, 제목을 보니 하나는 삶이고 하나는 죽음입니다. 작가는 여기서도 삶과 죽음 사이의 경계를 허물 것을 요구합니다. 그런데 통격의 방식이 독특합니다. 있는 그대로, 본래 그대로를 직시할 때 생과 사를 넘어설 수 있다는 역설을 제기합니다. 즉 삶은 삶이고 죽음은 죽음임을 받아들일 때, 삶과 죽음에 매이지 않게 된다는 것이지요. 집착을 넘어선 각성을 통격의 방식으로 보는 듯해요. 우리는 삶과 죽음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가 버겁습니다. 네모 안의 눈동자들을 보세요. 조금은 두렵고 조금은 떨고 있지 않나요? 삶과 죽음을 넘어서는 일은 수도자들도 쉽지 않은 일이거든요. 이럴 때 누군가에게 의지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작가는 이를 위해 두 분의 모성을 안배했습니다. 바로 관세음보살과 성모마리아입니다.

    남미의 어느 전승탑이 어머니의 상으로 표현된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했었어요. 종군(從軍)하는 남자를 마음 아파하는 이도 여인이요, 전쟁이 끝났을 때 가장 기뻐하는 이도 여인이기 때문입니다.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극렬한 공간이 전쟁입니다. 이를 극복하고 화해하는 상징으로 모성만한 것이 있을까요? 관세음보살과 성모마리아는 바로 그런 모성을 상징합니다. 구도의 길을 떠난 이들이 겪을 많은 고통과 상처, 좌절과 갈등을 다 지켜보면서 조용히 인내하고 관용하며 격려해 주는 존재가 바로 그들이지요. 종교의 외각(外殼)은 달라도 내면의 진리는 동일한 것, 두 분의 모습을 통해 이것을 말하고 있었습니다.

    모성은 화해의 아이콘입니다. 통격을 화해로 이끄는 존재이지요. 성모마리아의 모습은 여느 성당에서 보는 모습과는 달라요. 관세음보살도 다소 화려한 편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보여주는 미소는 온화함 그 자체입니다. 모두 세파(世波)를 딛고 서서 두 팔로 세상을 안아주는 넉넉함을 지니고 있습니다. 저는 이 부분을 주목합니다. 이처럼 중후하면서도 우아한 모습을 ‘전아(典雅)’라고 부릅니다. 전(典)하기에 메마르거나 앙상하지 않고, 아(雅)하기에 속되지 않고 품격이 있습니다. 그 극치를 [수월관음도]가 보여줍니다. 전시 공간의 끝에 관음으로 귀결한 것은 치우쳤다고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작가가 안배해 온 길을 따라왔다면, 그것은 화해의 상징으로 선택한 하나의 아이콘에 불과함을 눈치채실 것입니다. 화해를 통해 회통(會通)할 수 있는 상징으로 제시된 것일 뿐입니다. 고려 불화 속의 너그러운 관음상을 닮은 [수월관음도]는 옛 빛(古色)이 창연합니다. 옛 빛은 전아함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움이에요. 꽃잎이 떨어지며 어떤 말도 하지 않지만 우리는 그 고즈넉함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담박하기가 국화꽃과 같아도 우리는 그 쓸쓸함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글자 하나 붓질 하나가 없어도 그 맛은 더 오래가는 법, 옛 빛은 바로 그런 가운데 느껴지는 미감입니다. [수월관음도]가 보여준 옛 빛은 수많은 통격을 통해 이뤄낸 빛깔인 것입니다. [관세음보살]과 [수월관음도]의 관음(觀音)의 차이가 여기에 있습니다.
  • [웅혼雄渾], 미소와 문향, 그리고 웅혼
    -박대성, [코리아 판타지] [반가사유상] [난]
    견지하되 억지가 아니니(持之匪强)

    찾아오는 것이 끝없도다(來之無窮)
    제5관을 들어서자, 먹빛의 기세에 눌려 숨도 쉬지 못할 듯합니다. 벽면 한쪽을 가득히 채운 [코리아 판타지]는 상상할 수 있는 규모를 뛰어넘는 작품이었습니다. 수묵화가 나아갈 수 있는 극처(極處)를 경험하고 있는 작가는 이 안에 거대한 서사시를 담아내고 있었습니다. 이제 천천히 기운을 차리고 그림 앞에 다가섭니다.

    그림의 중앙에는 반구대 암각화를 비롯해 고구려의 사신도(四神圖), 무용총의 사냥하는 벽화, 신라의 천마도(天馬圖) 등 선사시대와 삼국시대의 도상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옛날 이곳에 살았던 사람들이 그렸던 그림에는 그들의 삶과 소망이 담겨 있었습니다. 암각화를 가운데에 놓고, 화면의 왼쪽은 금강산의 폭포요 오른편은 해금강입니다. 폭포에서 곧장 하강하던 물은 직각으로 수평을 이루며 도도하게 흐르다가 바다와 만나는 지점에서 돌기둥들과 부딪히며 파도로 솟구쳐 일렁이네요. 중앙 윗부분에는 한라산 백록담이 자리하고, 해금강의 위쪽에 백두산의 천지가 북두칠성 아래로 그려져 있습니다. 붉은 해와 금빛을 뿌리는 달도 이 땅을 밝혀주고, 폭포수 아래로 무지개도 떠 있습니다. 산과 바다, 폭포와 못(池), 그리고 오랜 세월 살아오느라 몸을 용 틀었던 소나무도 있습니다. 삼릉(三陵)의 소나무를 닮았습니다. 또한 그림의 하단에는 좌에서 우로 고구려 호태왕비문과 훈민정음, 하회탈을 시작으로 궁궐이나 무덤에서 나왔을 법한 유물들, 그리고 맨 오른쪽에 단군이 차분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언뜻 보면 일렬로 나열된 문화 유물들은 화면에 흐르는 거침없는 기세와 균형을 이루지 못합니다. 터질 듯이 그려진 산수 자연과 달리, 이들은 마치 박물학적 사물과 지식의 나열처럼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곳에 작가의 묘안이 있습니다. 그는 [코리아 판타지]가 단순히 풍경을 그린 수묵화가 되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간 그려내었던 풍경들도 산하의 곳곳을 아름답게 각출(刻出)해 내었지만, 뭔가 아쉬운 점이 있었던 듯합니다. [코리아 판타지]는 오랜 시간 고민했던 문제, 가장 한국적인 풍경을 염두에 두되 그 원천이 어디인지를 탐구했던 결과입니다. 수묵이라는 제한적인 표현 방식으로서도 [코리아 판타지]는 기세의 도도함과 지식의 차분함을 찬찬히 그러나 격조있게 그려내고 있었습니다.

    문득 작가가 산천을 통해 성찰해 낸 사람들의 삶을 생각해 봅니다. 영웅적인 인물의 서사로 역사를 이야기하는 드라마는 결국 상처와 아쉬움으로 막을 내리는 비장미를 갖추지만, 허구일 뿐입니다. 오히려 옛터에서 찾을 수 있었던 그릇과 유물들, 혹여 사람의 표정을 전해주는 불두(佛頭)나 탈, 와편(瓦片)들이 사람의 삶을 정확히 전해주는 것은 아닐지 생각해 봅니다. 아, 이제 알겠습니다. [코리아 판타지]를 접할 때 경각(驚覺)했던 이유는 화폭이 거대하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인간의 삶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조국의 산천과 문화를 어떻게 가다듬을 것인가를 일깨워주는 각성(覺醒) 때문이었습니다.

    이 그림과 마주한 건너편 벽면에 [반가사유상]이 걸려있습니다. 높이는 [코리아 판타지]와 비슷합니다. 그런데 저는 이를 보자마자 금세 눈물이 났습니다. 고요히 앉아 있는 불상은 날렵한 몸매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무엇도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이나 사악한 무리를 처단하려는 억센 위무(威武)도 없습니다. 심지어 그는 자신을 바라보는 저를 쳐다보지도 않습니다. 그냥 편안하게 앉아서 눈을 지그시 내리고 수줍게 미소 짓고 있습니다. 한쪽 발만 좌석에 걸치고 되는대로 옷을 걸친 그는 조용히 저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 네 맘을 다 안다. 그간 힘들었지. 이제 편안하더라.” 불상의 은은한 미소는 저를 더 다가오라고 합니다. 그간 세파에 주눅이 들어 겨우 견디고 있던 마음을 풀어주려는가 봅니다.

    순간, 뒤를 돌아봅니다. [코리아 판타지]가 나를 봅니다. 이렇게 다른 분위기를 주는 작품의 작가가 동일한 인물이라니!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만상을 갖추고서 하늘을 가로지르며, 뭉게뭉게 구름이 일더니만 거대한 바람도 고요하다(具備萬物 橫絶太空 荒荒油雲 寥寥長風)”는 풍경을 떠올려 봅니다. 이런 분위기를 옛사람은 ‘웅혼(雄渾)’이란 이름을 붙였어요. 웅혼은 거대한 기상을 말하지만 억지로 비틀거나 강요하거나 애쓰지 않습니다. 자연스럽게 호연(浩然)한 역량이 넘쳐나서, 견지하되 억지가 아니라 미래에 찾아오는 것이 끝없음을 명명한 것입니다. 특히 [반가사유상]의 미소가 억겁의 고통을 겪은 뒤에 얻어진 것임을 기억해 보면, 이 미소를 주목할 필요가 있을 듯합니다. 끝으로 덧붙여 말하자면 미소는 눈에 보입니다. 그런데 이 전시 공간에 [난]이 몇 점 있어요. 난초는 촉을 올리고 꽃을 피우되 향낭을 살포시 터뜨리며 넌지시 향기를 전합니다. 이를 암향(暗香)이라고 부르고, 그 향기를 맡는 것을 문향(聞香)이라고 합니다. 저는 보이지 않는 향기를 맡고 상처를 보듬어주는 미소를 지을 수 있는 여유를 배워갑니다.
  • [여적餘滴] 다시_사람됨을 찾아서
    작가들이 보여주는 심미의 세계는 우리를 황홀하게 만듭니다. [노자]에 의하면 ‘황홀(恍惚)’은 도(道)의 모습을 드러내기 위한 표현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도는 삶의 결[生理]을 깨달은 뒤에 얻어진 경지를 뜻하지요.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누구도 구도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마다 살아가는 방식을 수십 년간 찾아가고 있는 셈입니다. 비록 그사이에 경중(輕重)과 고하(高下)가 있기는 하지만, 존재하는 모든 이는 저마다의 도를 찾는 수행자들인 셈입니다. [신라한향]에서 작가들도 자신이 깨친 도를 각자의 장점을 활용하여 드러내고 있습니다. 저는 그들이 보여준 진지함과 성실함에 감동합니다. 그들은 지금-이곳 사람들의 삶을 이해하고 현재를 넘어서는 지점을 모색하기 위하여, 신라인의 지혜를 빌려와 자기만의 미학적 해석을 하고 나아가 하나의 깨달음을 전해주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것을 사람의 인격적 성숙 과정에 대한 미적 표현으로 부르고자 합니다.

    박선민은 푸른빛의 응시를 통해 자아의 각성을 요구했고, 김민은 금은(金銀) 빛의 관조를 통해 염원을 읽고자 했으며, 송천은 옛 빛의 화해를 통해 격절을 넘어선 사람됨을 지향했고, 박대성은 먹빛의 웅대한 기상과 따스한 미소로 인격적 성장의 매듭 터[結地]를 알려주었습니다. 이는 담백하게 나를 들여다보는 충담에서 시작하여 허영 속에서 만상의 실상을 담아내는 함축을 거쳐, 법도를 이해하되 품위 있는 화해를 추구하는 전아를 겪고, 웅장한 기세를 견지하되 자연스러운 웅혼을 터득하는 사람됨을 꿈꾸도록 해줍니다. [신라한향]은 ‘신라에서 피어난 한국의 향기’라는 부제가 붙어 있습니다. 저는 작가들이 보여주고 있는 사람다움의 향기를 통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더욱 아름다워지기를 기원해 봅니다. 이제 다시 사람됨을 찾는 미의 역정(歷程)이 시작되었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