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지우현 : 玄之又玄
현지우현 : 玄之又玄
- 기간2024.06.22.~2024.08.04.
- 장소솔거미술관 박대성 전시관 1-5관
전시서문
넓고 큰 이치는 변함이 없으니, 오묘하고 또 오묘하도다.
- 경상북도문화관광공사 경주솔거미술관은 한국 근현대 화단에 큰 발자국을 남긴 이응노 화백의 탄생 12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소산 박대성 화백과의 교류전을 준비하였다. 이번 교류전은 홍성군에 소재한 이응노 생가 기념관과 함께하는 공동 전시로서 2023년 11월에 1차 전시가 홍성에서 개최되었으며, 경주솔거미술관에서 이응노 화백을 소개하는 전시를 선보인다. 이번 전시를 통하여 전혀 다른 삶을 살아온 두 거장이 걸어온 흔적을 살펴보며 한 평생을 그림에 바친 두 사람이 추구한 삶의 이치를 살펴보고 제고하고자 한다.
- 1. 이응노
이응노 화백은 일제의 식민 시대인 1904년 충청남도 홍성에서 태어나 한국전쟁과 격동하는 한국 근현대사를 온몸으로 겪었다. 그는 서당을 운영하였던 아버지에게 한문을 배웠으며, 보통학교를 다니며 그림 그리기에 재미를 붙이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신식 교육과 문화를 받아들이며 끊임없이 외부 세계로 호기심이 생겨났고 인생을 개척하고 싶어졌다. 그러나 신신교육과 현대 문물에 부정적이었던 가풍으로 인해 아버지와 잦은 충돌이 있었다.
이응노 화백은 1922년 집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서울로 상경하여 고인이 타는 상여에 그림을 그리는 일부터 간판 제작까지 다양한 일들을 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그렇게 벌어들인 돈으로 그림을 그리고 배웠다. 그의 노력과 별개로 그 당시 가장 큰 미술대회인 <조선 미술전>에서 6번이나 낙선하였다. 당시 전통적인 서화를 그렸던 이응노 화백은 자신이 배운 그림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30대에 들어서 다시 일본으로의 유학을 감행하였다. 일본에서는 유행하였던 풍경화를 주로 배우고 그렸다. 그렇게 전통적인 서화에서 서양식의 풍경화로 화풍을 옮겼다. 식민지 상황에서 한국과 일본을 넘나들며 배운 그림들은 식민 문화 정치에서 파생된 것이라고도 할 수 있으나, 이응노 화백이 그 당시 획득한 배움은 향 후 그의 그림이 추상으로 변화하는데 중요한 작용을 하게 된다.
시간이 흘러 대한민국은 해방을 맞이하게 되었고 가까운 시기에 한국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전쟁은 한반도 전체를 폐허로 만들었고 예술인들 또한 전쟁의 상흔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가난과 분노가 만연한 사회는 아이러니하게도 그 당시 예술계가 세계의 흐름과 정세를 받아들이기 좋은 환경이었다. 계급이 사라지고 잔악한 식민정치도 사라졌으니 자유롭게 사고하고 배울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진 것이다. 이응노 화백은 전쟁 직전 홍익대학교 미술학부 교수로 부임하였고, 1954년에는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에 출강을 하는 등 예술계에서의 활동을 이어갔다.
한국전쟁 휴전 이 후, 이응노 화백은 교수직을 내려놓고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다. 프랑스에 정착하여 다양한 서양 미술을 접하면서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만들어 갔으며, 그 예술세계에는 가족에 대한 사랑이 많은 작용을 하였다. 이응노 화백은 한국전쟁 중에 양자로 삼은 아들이 의용군으로 끌려갔으며 북한군의 포로가 되었다. 이 사건은 먼 훗날 동베를린 간첩단 사건으로 연결된다. 이응노 화백은 전쟁 이후 아들이 북한군 포로로 잡혀있다는 사실을 알고 아들과의 만남을 위해 독일에 소재한 북한 대사관과의 접촉으로 간첩 사건에 연루되었다. 아들을 보기 위한 행위가 간첩 행위로 간주되어 서대문 형무소와 대전, 안양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그 곳에서 300점에 이르는 작품을 제작하였다. 그 이 후 프랑스에서 창작활동을 이어가며 군상 시리즈를 제작하는 등 세계 예술계에 족적을 남기게 된다. 그리고 많은 시간이 흘러 85세가 되던 해에 간첩 혐의가 풀리면서 한국 미술계로 복귀를 준비하였다. 86세가 되던 해에 호암미술관에서 개인전을 개최하고 귀국을 앞둔 시점에 심장 마비로 생을 마치게 된다. 현재 이응노 화백의 유해는 파리에 있는 묘역에 안장되어 있다.
끊임없는 세계 질서의 변화 속에서 이응노 화백의 삶도 끊임없이 움직이고 변하였다. 홍성에서 서울로, 서울에서 프랑스 파리로, 그 후 동백림 사건으로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여정까지 다사다난한 삶의 파도를 묵묵히 견뎌내었다. 그와 동시에 낯선 것에 적응하고 융화되며 인식의 지평을 넓혀 갔다. 그렇게 전통 수묵화로 예술계에 발을 들인 이응노 화백은 당시 세계 미술사의 흐름이었던 ‘추상(abstracting)’예술을 수용함으로서 자신만의 독창적인 조형언어를 탄생시켰다. 이응노 화백의 회화와 조각은 한국 미술이 가진 정체성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회화로서 한국 미술이 세계에 나설 수 있는 근간을 만들어 주었다.
- 2. 박대성
박대성 화백은 1945년 경상북도 청도의 한 마을에서 태어났다. 해방의 기쁨도 잠시, 5살이 되던 해에 한국전쟁이 발발하였으며 청도 산골 마을도 전쟁의 화마를 피해가지 못하였다. 박대성 화백은 5살 되던 해에 전쟁의 상흔으로 부모와 왼쪽 팔을 잃어버렸다. 감당하기 어려운 큰 고통과 상처를 너무 어린 나이에 경험한 박대성 화백은 친척집을 전전하며 그림을 통해 본인을 치유하였다. 학업은 중도에 그만두었다. 그림 그리기에 전념한 그는 전국의 산천을 돌며 그림을 그렸다. 20대에는 대구를 거점으로 자연을 스승으로 모시고 선대의 화가인 추사 김정희와 겸재 정선 과 같은 명 화가들의 그림을 쫓으며 부단히 노력하였다. 그 결과 무학의 화가가 1976년 대한민국 ‘중앙 미술대전’에서 대상을 받아내는 쾌거를 이룩하였다. 그러나 학벌과 파벌이 중시되던 그 당시 미술계에서는 박대성 화백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무학의 화가라는 인식과 장애에 대한 편견은 무시할 수 없는 콤플렉스였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겨내지 못 할 벽도 아니었다. 박대성 화백은 어려운 환경에서도 끊임없이 그림을 공부 하였다. 80년대에 들어서는 세계를 유랑하며 그 곳의 정취와 풍경을 그렸다. 그리고 세계 각지의 그림과 문화를 경험하였다. 박대성 화백은 전통 수묵을 바탕으로 풍경화와 서화를 그렸다. 80년 대 이후부터 박대성 화백의 그림에서 전통적인 수묵의 양식과 혼재된 서양 모더니즘 회화의 양식들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수묵이 가지고 있는 큰 줄기는 중심을 유지하였다. 대신 서양 모더니즘의 양식적인 측면들이 녹아들어서 수묵이 지닌 특성과 어우러지는 풍경화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80년대 후반에는 대기업의 전속 작가로서 대형 개인전을 개최하고 다양한 전시에 초대되기 시작하였다. 각고의 노력 끝에 박대성 화백이 추구하는 예술세계가 세상에 드러나기 시작한 시기였다. 그러나 10년 정도가 지난 뒤 돌연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경상북도 경주에 터를 잡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박대성 화백의 그림은 경주 생활 이 전과 이 후로 나누어 질 만큼 극명한 화풍의 변화를 겪었다. 작가에게 화풍이 변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특히 40대 이 후 자신이 성취하고 인정받은 그림들로부터의 해방은 더욱 쉽지 않다. 충분히 이룰 것을 이룬 50대 작가가 다시 창작이라는 고뇌의 숲으로 들어간 것이다.
변화의 노력 끝에 1996년‘천년배산’을 완성하였다. 이 그림이 한국 수묵화단에 던진 화두는 동시대에 수묵화가 나아가야 할 길이었다. 과거의 법도와 기법을 중시하는 수묵의 세계에 기법과 정신이 완전히 다른 서양화의 회화 양식이 수묵기법에 융화되어 구현되었다. 전통을 지키되 창조를 위한 개방과 포용이 그림에 고스란히 녹아든 것 이다. 이 후 계속된 창작활동으로 소산수묵이라는 독창적인 장르를 개척하였다.
서로 다른 장르의 기법과 정신을 조화롭게 융합하기 위해서는 대상의 깊이 있는 이해도와 숙련도가 필요하다. 이러한 지점에서‘천년배산’은 과거의 한국화와 달리 완전히 새로 그려진 그림이나 기존의 수묵화를 고려하였을 때 별다른 위화감이 들지 않는다. 원래 있었던 장르의 그림처럼 자연스럽게 관객에게 다가온다. 자연스러움은 익숙함을 의미하며 익숙함은 편안함과 연결된다. ‘천년배산’이 완전히 새로운 방법으로 그려졌지만 현재까지 작품성이 화자되고 관객에게 다가갈 수 있는 것은 오랜 하도작업으로 얻어진 단단한 기초와 타 장르의 기법을 포용하고 적용하는 실험적인 작가정신이 투영되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Hyun-Ji-Woo-hyun: 玄之又玄
The broad and great reason remains the same, so it is both subtle and mysterious.
- The Gyeongju Solgeo Museum of Art, the Gyeongsangbuk-do Cultural Tourism Organization, prepared an exchange exhibition with artist Park Dae-sung to commemorate the 120th anniversary of the birth of artist Lee ung-no, who left a big footprint in modern and contemporary Korean art. This exchange exhibition is a joint exhibition with the Lee ung-no Birthplace Memorial Hall located in Hongseong-gun, and the first exhibition was held in Hongseong in November 2023. Through this exhibition, we want to examine the traces of the two masters who have lived completely different lives, and examine and enhance the principles of life pursued by the two who have devoted their lives to painting.
- 1. Lee ung-no
Artist Lee ung-no was born in 1904 in Hongseong, South Chungcheong Province,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and suffered modern and contemporary Korean history that was turbulent with the Korean War. He learned Chinese characters from his father, who ran a seo-dang, and began to enjoy drawing while attending an ordinary school. And by accepting new education and culture, curiosity was constantly created to the outside world and I wanted to pioneer life. However, there were frequent conflicts with my father due to the family tradition that was negative for new education and modern culture.
Despite opposition from his family in 1922, painter Lee ung-no moved to Seoul and made a living by doing various jobs, from painting on biers riding by the deceased to making signs. I drew and learned from the money I earned. Apart from his efforts, he failed six times at the Joseon Art Exhibition, the largest art competition at the time. Artist Lee ung-no, who drew traditional paintings at the time, went back to study in Japan when he was in his 30s to overcome the limitations of the paintings he learned. I mainly learned and drew landscape paintings that were popular in Japan. Thus, the painting style shifted from traditional calligraphy to Western-style landscape painting. It can be said that the paintings learned across Korea and Japan in the colonial situation are derived from colonial culture and politics, but the learning Lee Eung-no acquired at that time plays an important role in transforming his paintings into abstraction in the future.
Over time, the Republic of Korea faced liberation and the Korean War broke out in the near term. The war left the entire Korean peninsula in ruins, and artists could not be free from the scars of war. Ironically, a society where poverty and anger were prevalent was a good environment for the art world to accept the flow and circumstances of the world at that time. As the class disappeared and the brutal colonial politics disappeared, an environment for free thinking and learning was created. Lee ung-no was appointed as a professor of art at Hong-ik University just before the war, and in 1954, he continued his activities in the art world by teaching at Chung-Ang University College of Art.
After the Korean War ceasefire, painter Lee ung-no gave up his teaching job and went to study in France. He settled in France and created his own art world by experiencing various Western art, and his love for his family played a lot in that art world. Artist Lee ung-no was taken to the volunteer army by his adopted son during the Korean War and became a prisoner of war by the North Korean military. This event leads to the East Berlin spy group incident in the distant future. After learning that his son was being held captive by the North Korean military after the war, artist Lee Ngno was involved in the spy case through contact with the North Korean embassy based in Germany to meet with his son. The act of seeing his son was considered an act of espionage and was imprisoned in Seodaemun Prison, Daejeon, and Anyang Prison. There, he produced up to 300 works. After that, he continued his creative activities in France and left his mark on the world art world, producing a series of military awards. And after much time, when he was 85 years old, he prepared to return to the Korean art world as the charges of espionage were lifted. At the age of 86, he held a solo exhibition at the Hoam Museum of Art and died of a heart attack when he was about to return home. The remains of artist Lee ung-no are now buried in a grave in Paris.
In the midst of constant changes in the world order, the life of artist Lee ung-no was constantly moving and changing. From Hongseong to Seoul, from Seoul to Paris, France, and after that, the Dong-baek Forest incident did not allow us to return to Korea. I endured the waves of my life silently. At the same time, he adapted to unfamiliar things, fused them, and expanded the horizon of perception. Artist Lee Eung-no, who entered the art world with traditional ink painting, created his own original formative language by embracing "abstracting" art, which was the flow of world art history at the time. Paintings and sculptures by artist Lee Eung-no are paintings that incorporate the identity of Korean art, and have laid the foundation for Korean art to enter the world.
- 2. Park Dae Sung
Artist Park Dae-sung was born in 1945 in a village in Cheongdo, North Gyeongsang Province. The joy of liberation was also brief, and the Korean War broke out at the age of five, and Cheongdo Mountain Village did not escape the fire of the war. Artist Park Dae-sung lost his parents and left arm in a war scar at the age of five. Artist Park Dae-sung, who experienced great pain and wounds that were difficult to handle at an early age, traveled around his relative's house and healed himself through paintings. He gave up his studies. Dedicated to painting, he went around the mountains and streams across the country to paint. In his 20s, he worked tirelessly to pursue paintings by famous artists such as Chusa Kim Jung-hee and Gyeomjae Jeongseon, with nature as a teacher based in Daegu. As a result, an unschooled artist achieved the feat of winning the grand prize at the 'Central Art Exhibition' in Korea in 1976. However, at that time, when academic backgrounds and factions were important, the art world looked at painter Park Dae-sung with an unflattering gaze.
The perception of being an unschooled painter and prejudice against disability would have been a complex that could not be ignored. However, it was not a wall that could not be overcome. Artist Park Dae-sung constantly studied painting even in a difficult environment. In the 1980s, he wandered around the world and drew the atmosphere and scenery of the place. And I experienced paintings and cultures from all over the world. Artist Park Dae-sung painted landscape and calligraphy based on traditional ink-and-wash painting. From the 1980s onwards, the paintings of artist Park Dae-sung began to gradually reveal the styles of Western modernist painting mixed with the traditional ink-and-wash style. However, the large stem of ink-and-wash maintained its center. Instead, the stylistic aspects of Western modernism melted, and landscape paintings that harmonized with the characteristics of ink-and-wash began to appear.
In the late 1980s, as an exclusive artist of a large company, he held large-scale solo exhibitions and began to be invited to various exhibitions. After hard work, it was a time when the art world pursued by artist Park Dae-sung began to be revealed to the world. However, about 10 years later, he suddenly ended his life in Seoul, settled down in Gyeongju, Gyeongsangbuk-do, and began painting.
The paintings of artist Park Dae-sung went through a drastic change in painting style that was divided into before and after his life in Gyeongju. It is not easy for the artist to change his painting style. In particular, it is not easier to liberate from the paintings he has achieved and recognized since his 40s. The artist in his 50s, who has achieved enough, has entered the forest of agony of creation again.
After the efforts of change, 'Thousand-Year back mountain' was completed in 1996. The topic of this painting to the Korean ink painting group was the way ink painting should go in the contemporary era. In the world of ink painting, which values the laws and techniques of the past, the style of Western painting with completely different techniques and spirit was integrated and implemented in ink techniques. While keeping tradition, openness and inclusion for creation are incorporated into the picture. After that, through continuous creative activities, the original genre of Sosan ink was pioneered.
In order to harmoniously fuse techniques and minds of different genres, in-depth understanding and proficiency of the object are required. At this point, unlike Korean ink paintings in the past, 'Thousand-Year back mountain' does not feel much strange considering the completely new paintings or existing Korean ink paintings. It approaches the audience naturally like a picture of the original genre. Naturalness means familiarity, and familiarity is linked to comfort. Although "Thousand-year back mountain" has been painted in a completely new way, it can be said that the reason why the work has been talked about and approached the audience is because it reflects the hard foundation obtained by long underwater work and the experimental artist spirit of embracing and applying techniques from other genres.